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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형성에 기여한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by 부품쟁이 2023. 9. 10.

후삼국시대란 호족의 반란에 의해 분열된 통일신라의 종말을 말합니다. 900년부터 936년까지의 후 삼국 건국이며, 고구려, 신라, 백제의 대립시기와 구별하기 때문에 이 시기는 후삼국 시대라고도 불립니다. 이 시대는 고려건국과 관계가 있으므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후삼국 시대의 주요 국가와 인물

신라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는 왕권 강화와 귀족의 통일정책을 추진해 안정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시대 말기가 되면 일부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 간의 권력투쟁에 의해 지방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중앙정부가 통제를 잃고 지방귀족이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국왕입니다. 그녀는 한국사에서 최초로 여성으로서 왕위에 오른 여왕입니다. 그녀의 부친인 진평왕은 부계사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의 딸인 선덕여왕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최초의 여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귀족 세력이 집중된 사회 구조에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선덕여왕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과 숭불 정책으로 불교 문화를불교문화를 융성하여 혼란한 내부를 결속하는 계기를 마련해 왔습니다. 선덕여왕은 불교문화를 보호하고 육성함으로써, 그녀의 시대에 여러 불교 역사의 유물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첨성대, 분황사 등의 이름으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그녀의 시대에 많은 일들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녀는 한국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불교 문화의 보호와 육성을 통해 많은 역사적 유물들을 남겨두었습니다.

후고구려

 

태봉은 901년에 승려 궁예의 건의로 건국되었습니다. 그는 고구려 왕가에서 태어나 새로운 왕국을 꿈꾸며 반신라 봉기세력과 규합하여 901년 강원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고구려 후손을 지칭하며, 국호를 고려라고 정하고 건국했습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한이라 하였으며, 911년에는 태봉이라는 이름을 채택하였으며 고려가 건국할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왕건의 고려와 차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는 명칭을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한 궁예는 수도인 철원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개성, 강원도 수도권, 충청 일부 지역까지 확장했습니다. 이후 후백제 남부 나주 일대까지 점령하여 견훤을 압박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전제 왕권을 내세우며 폭군으로 타락해갔습니다. 또한 민심이 반발하여 중앙 관리 및 지방 호족 세력의 반란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918년 당시 민중의 신뢰를 얻은 왕건이 신왕으로 추대되어 궁예는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궁예

궁예는 몰락한 신라 귀족의 후예로, 정권 다툼에서 희생양이 되어 지방으로 내쫓겨 승려가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라가 쇠약한 시기에는 반 신라 세력들의 힘을 결집하여 강원도와 수도권 일대를 장악하고, 신라의 일부 호족 세력과 고구려의 후손인 왕건 일가와 손을 잡고 고려를 건국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중앙집권식 폭군 정치로 민심이 반발하여 왕권을 왕건에게 내주게 되기 전까지는 후백재와 더불어 신라를 위협하는 존재로 알려졌습니다.

후백제

백제는 서기 900년에 신라의 9주 가운데, 지금의 광주 지역을 기반으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잊을 수 없는 정통성을 부여하여 국호를 백제로 정하고 건국하였습니다. 초대 왕인 견훤은 광주를 거점으로 전주와 충주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백제의 후예를 자청하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고려의 왕건과 화친을 맺었지만, 잦은 세력 다툼을 이어간다. 그러나, 신라의 대한 공격을 이어가고 김해까지 점령하여 후백제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후백제는 내부 군협으로 인해 견훤의 처우에 불만을 느끼는 일부 호족의 반란 등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927년 경주를 급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왕건의 세력을 물리치며 후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이후에는 내부 분쟁으로 인해 망하게 되었습니다.

견훤

농민 출신 장군인 아자개의 장자로 태어난 견훤은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세력을 모아 반 신라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892년 광주 지역을 점령하고 거점을 삼으며 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900년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920년 신라의 군사적 보루인 합천(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신라의 도움을 요청하여 고려와 화친하며, 잠시 물러난 뒤 재정비 후,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인 후 백제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처럼 견훤은 신라를 계속해서 공격하여 왕건도 물리치며,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것처럼 야망을 드러내게 됩니다.

견훤은 고려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역량이 필수라고 생각하여, 중국과 외교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거란을 멸망시킨 바람에 거란과 친교를 맺어 고려를 압박하는 수단을 사용하였습니다.

백제는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내부가 분열되어 결국 견훤이 왕건에 투항하며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후삼국 시대의 유산

불교의 장려와 문화

삼국시대 불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신라와 백제에서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왕조가 세워졌으며, 이는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 불교는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고 불교의 실천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연민과 내면의 평화를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한국인의 철학과 가치관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삼국시대는 불교미술을 비롯한 예술이 꽃피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불교 조각, 회화, 기타 예술 작품이 창작되었으며, 이는 한국 사회에서 불교의 중요성이 커졌음을 반영합니다.

전반적으로 삼국시대는 한국 불교 발전의 중추적인 시기였으며, 한국의 문화, 예술, 철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불안과 외세 침략

삼국 시대는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입니다. 이 시기에는 국가 간 갈등과 정치적 불안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 시대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됩니다.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중 신라의 김유신은 당대 최고의 무신으로, 신라와 백제를 함께 물리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무력한 행보를 바탕으로 대륙을 향해 진출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후세에 이어지는 역사적인 재료가 되었습니다.

삼국 시대는 불확실한 시기였지만, 그 시대의 인물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업적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업적은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고려의 등장

삼국시대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고려의 건국이다. 왕건의 지휘 아래 고려는 한반도를 통일하고 북방의 여진족과 전쟁을 벌여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고려 왕조의 건국은 정치적 통일뿐만 아니라 불교의 확산, 예술과 건축에 있어 고려 특유의 양식이 발전하는 등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사의 이 시대는 큰 진보와 성취의 시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결론

후삼국 시대는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다양한 국가와 인물, 정치적 사건, 문화적 영향 등이 엮여 있습니다. 이 시대는 고려의 탄생과 함께 불교의 번영과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한반도 역사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오늘은 삼국시대의 마지막인 후삼국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은 후삼국 시대의 한 축이었던 발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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