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rigin="anonymous"> 조선의 폭군? 성군? 광해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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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폭군? 성군? 광해군 이야기

by 부품쟁이 2023. 11. 3.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으로 임진왜란과 여러 정변을 맞아 폐위당한 두 번째 국왕이었다. 아버지 선조의 핍박과 명나라의 세자 책봉 거부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임진왜란의 뛰어난 활약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인 공빈 김 씨의 이른 죽음과 조정 내의 취약한 입지 등으로 대북파를 중용하면서, 정적을 제거하는데 집착하였다. 또한, 자신의 입지를 위해 무리수를 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폐위로 왕권의 지위가 점점 무너져 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하기에 이른다. 이에 광해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세자 책봉

광해군은 1575년(선조 8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선조의 첫 후궁인 공빈 김 씨(공성왕후)이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후사가 없어, 후궁인 공빈 김 씨의 두 자녀인 임해군과 광해군이 장남과 차남이 되었다. 선조는 후궁을 아홉을 두었는데, 1591년 선조가 나이가 들게 되면서 후계 문제를 여러 대신들이 건의하여, 13명의 왕자 중 세자 책봉에 관련하여 논의하였는데, 여러 시험을 통해 세자를 선발하기로 하였다. 적장자가 없는 상태에선 총명하고, 학문에 깊이가 있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는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선조는 후궁 인빈 김 씨를 총애하며, 그의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선조의 의중을 파악한 영의정 이산해가 이를 주도하게 되었다. 동인의 수장인 이산해는 "기축옥사"로 피해를 봤던 동인을 규합시키고, 서인을 몰아내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한 좌의정인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 건의하였는데, 선조는 격노하며 정철을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는 등 동인을 끌어들여 서인에 대한 보복을 이어갔었다. 또한, 이 과정에 동인들이 서인 척결과 정철 처리문제로 분열되며,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세자 책봉 문제는 의인왕후의 대군이 태어나지 못하면서, 13명의 군(君) 중에 세자로 책봉하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선조의 반대로 세자 책봉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미루어지게 됩니다.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선조 25년)에 일어났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보름 만에 한양으로 북진할 기세를 보이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을 계획하며 파천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세자 책봉의 의견이 개진되어 조정의 대신을 의견을 물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그 다음날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파천에 이르자, 선조의 민심은 극에 달하게 되는데 백성을 버리고 파천을 선택한 국왕을 비난하기에 이르게 되자, 선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왜의 기세에 대응하기 위해 "분조" 선택한다. "분조"란 국왕의 권력을 왕세자들에게 이양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해 군수물자를 공유한다는 복안을 내세운다.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를 왕세자들에 나눠 관리한다는 취지인데 특히, 광해군은 각 지역을 돌며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민심을 수습과 동시에 의병을 모집 등 큰 공을 세워 백성들을 규합할 수 있게 되었다. 명의 군사 원조를 받아 왜군을 물리치며, 개성을 탈환한 선조는 한양을 복귀한 뒤, 광해군을 전라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임명하며 내려보낸다. 이는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계기로 명나라가 왜군과 강화협상을 하며, 당사자를 배제한 것에 반발한 선조의 선택이었다. 이에 반발한 명의 황제는 선조의 왕위 교체론을 언급하며, 왕세자에게 정권을 넘기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해 와 광해군을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왕위 계승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죽음으로 새로운 정비를 얻었는데,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정비가 되었다. 1606년 그녀가 영창대군을 낳고 적장자가 탄생하여, 왕세자인 광해군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우려대로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선조를 대신하여 많은 일을 진두지회 했던 광해군을 폐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북파 영의정 유영경이 나서서 영창대군 옹립을 추진하며 적통성을 내세우는 한편, 의병장이면서 대북파인 정인홍이 광해군을 지원하면서 왕위를 둘러싸면서 대북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정을 장악한 대북 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갈라지게 되는데, 적장자를 우선시하는 선조의 의중대로 유영경이 조정을 장악하여,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를 유배 보내고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런데, 선조의 지병이 악화되면서 영창대군의 어린 나이를 우려한 선조는 교서를 내려 광해군에게 왕위 계승을 명령하였지만, 영의정 유영경이 선조의 교서를 숨겼다가 발각되면서 대신들의 유영경 처벌을 촉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조가 왕위를 결정하지 못하고 죽자, 왕위 계승의 선택은 인목왕후가 결정하게 되었다. 유영경을 필두로 여러 대신들은 영창대군을 즉위시켜 수렴청정을 요구하였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하여 광해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왕권 강화

광해군은 항상 적통성 문제로 어려움이 많았던 국왕이었다. 이에 광해군의 지지기반인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을 중심으로 동인, 서인, 남인 등 당파의 구분 없이 적새적소에 인재를 중용하고,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져 간 백두대간을 복원을 위해 국방, 외교, 민생 안정에 중점을 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또한, 광해군의 명석한 판단으로 당파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 정국은 안정되었고, 이 시기에 편찬된 "대동법"은 백성들의 과도한 세금을 낮추면서 민심이 안정되었다.

계축옥사와 역모 사건

1612년 역모사건이 불거졌는데, 옥쇄를 위조한 김직재가 그의 아들과 역모를 꾸몄다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실체는 순화군의 장인 황혁이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을 왕으로 옹립 시 키위 한 역모였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조정 신료들이 모두 사사되거나 유배된 사건이었다. 이 역모의 핵심인 서인, 남인 출신들이 몰락하고, 대북파가 조정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1613년에는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였는데, 소북파 영수인 유영경이 광해군 즉위 때부터 적통성을 강조하며, 영창대군 즉위를 주창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지지기반이 부족한 광해군의 측근인 대북파가 박응서, 서양갑 등 여주 서자 출신 7인이 저질은 은 수백 량을 강탈 및 살인 사건을 매개로 옥사를 모의하였다. 이들은 "강변칠우"라는 불리며, 자신들의 출신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불만을 상소하였는데, 거부당하자 홧김에 저질은 사건이었다. 대북 파는 박응서로부터 허위자백을 받아 역모 사건으로 연결하여, 인목왕후 아버지 김제남의 지시로 역모를 꾸몄고, 인목왕후도 가담했다고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이 일로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 사위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로 유배되면서 사사된다. 인목왕후는 사실상 폐위되어, 정명공주와 경운궁 석어당에 위리안치되었다.

결론

이 자료를 준비하면서 광해군이 왜 폭군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입장을 이해하기 보다는 당파싸움에 휘말린 조선의 역사를 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취지의 표현인데, 다음에 다루게 될 "인조반정"을 통해 폭군인지? 성군인지? 판단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다른 건 몰라도 대동법 시행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고, 임진왜란때 소실된 자료를 복원한게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을 생각하면 한편으론 재평가가 되 필요한 국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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