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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의 등장, 선조 이야기

by 부품쟁이 2023. 10. 23.

선조는 즉위 직후부터 사화를 입은 사림들을 복권하고, 성리학의 대학자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을 중용하여 침체된 조정을 개편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림들은 파벌로 갈라져 당쟁이 극심해졌고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습니다. 이 와중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과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임진왜란 후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조의 붕당정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방계혈통의 국왕

조선의 왕은 보통 적장자 혹은 적장손 출신이 후계를 삶고자, 세자의 책봉이나 왕위 계승에 있어서는 순리로 여겨졌습니다. 다만,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혈통 왕위 계승자로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종의 서자이며, 일곱번째 아들이었던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은 명종의 세자인 순회세자가 이른 나이에 요절하자, 후사가 없던 명종은 후계자를 선발하기 위해 왕손들을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1567년 6월(명종 22년) 명종이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후사가 결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한 대신들이 쓰러진 명종에게 후사를 종용했습니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 씨에게 후사를 정하도록 하였고, 이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명종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세자로 책봉하였다고 합니다. 평소 명종이 하성군의 총명함에 마음속으로 왕위 계승을 논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다만, 아무리 총명하다 할지라도 1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왕으로써 외척과 사림세력의 당쟁으로 어지러운 조정을 이끌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1년간 유지했고 어린 나이였지만, 뛰어난 정치력으로 조정을 무난히 운영했다고 합니다.

즉위 후 정치구도

선조는 즉위 초부터 학문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세자수업 없이 왕위에 오른 터라 대신들과 매일 경서와 사서를 토론하며, 밤낮없이 독서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또한, 훈구 세력을 멀리하고, 대거 사림 세력을 중용하여 조정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선조가 사림 세력을 끌어드린 것은 방계혈통이라는 자신의 후계 정통성을 확보하고, 당시 명망이 높았던 이황과 이이를 중용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고 합니다. 물론, 문정대비의 비호 아래 조정을 농락했던 소윤파를 배척하기 위한 처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선조의 등극으로 신진사류인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정권 초반에는 명종의 명을 받은 이준경과 인순왕후의 아우로 외척을 대표하는 심의겸이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집권하는데, 핵심세력의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붕당정치

조선의 정치구도에 붕당정치는 또 하나의 틀을 만드는 정치 세력으로 용인되고, 학문적으로 한결이거나 같이 수학한 학우들끼리의 관계를 의미해서 학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조 때 중심이 되었던 붕당은 큰 틀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지는데, 동인은 퇴계 이황의 사상을 따랐으며, 서인은 율곡 이이를 지지하는 학맥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동인은 이후에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정치 세력화된 붕당은 혼란스러운 조선 중기의 당쟁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특정 붕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타 붕당을 제거하고자 했고, 때때로 임금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붕당의 대립을 이용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영조와 정조 때는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붕당에 관계없이 두루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펴기도 했지만, 붕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선조 때는 이들 세력 간의 권력 타툼으로 향후 정치적 파란을 몰고 오는 "동서분당" 씨앗이 됩니다.

동서분당

당시 조선의 막강한 요직 중에 하나인 이조정랑(吏曹正郞)은 명망 있고 홍문관을 제수한 문신 중에 선임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조정랑은 비록 낮은 품계였으나, 조정의 각 부서 당하관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과 이조판서의 독립된 권리로 인사를 할 수 있는 인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정의 가장 큰 사정기관인 삼사의 추천권이 있어 재상으로 가는 탄탄대로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1572년(선조 5년) 이조전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젊고 명망있는 신진 사림인 김효원을 추천하자, 외척의 실세 심의겸은 반대했었다. 반대의 이유는 권신인 소윤파 윤형원과 가깝게 지내고 있어, 명망보다는 정치적인 소인배라고 폄하하며 반대를 했었습니다. 결국 오건이 후임을 정하지 않고 사직하고 낙향하자, 김효원이 오해를 풀고 이조정랑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심의겸의 가문과 대립하는 관계로 발전됩니다.

1574년(선조 7년) 임기가 끝나가는 이조전랑의 자리를 내심 노렸던 심의겸은 자신의 아우 심충겸을 차기 이조전랑에 추천하려 하자, 후임 지명권을 가진 김효원이 반대하여, 후임으로 이발을 이조전랑에 등용되면 두 세력은 격하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두 사림 세력의 분열로 젊은 사림은 김효원을, 노장 사림은 심의겸을 각각 지지하면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효원의 집이 도성에서 동쪽에 있어 "동인"으로, 심의겸의 집은 반대로 서쪽에 있어 "서인"으로 불렸습니다.

한 면, 선조는 대신들의 분열을 왕권강화에 활용하고자 숫적으로 다수인 동인보다는 서인 가까이에 서서 붕당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동인의 분열, 기축옥사

동서분당 이후, 동인의 분열을 자초한 사건이 있었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을 두고 말한다. 또한, 기축옥사(己丑獄死)로도 불린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3년)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율곡이이의 문하생이며, 젊은 서인이면서 조정에 진출하지 않는 인재였다. 그러나, 정여립이 문제의 인물로 등장한 시기는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하면서부터이다. 율곡이이의 문하에 있으면서 율곡선생을 "덜 익은 감이다”이라며 표현하고, 동인으로 전향하면서 소인배라며 비난하였다. 그런데, 왜 율곡선생을 비난하며, 동인으로 전향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여립의 거친 언사는 선조 앞에서도 이어졌다. 선조는 신임한 율곡이이를 비난한 정여립은 계속되는 동인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낙심한 정여립은 낙향하여 재기를 노리면서 진안군 죽도(竹島)에서 서사(書舍)를 차려놓고 "대동계"라는 조직을 세워 세를 불리면은 중 1589년(선조 22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이 정여립 일당이 그해 한강이 어는 겨울을 틈타 모반을 꽤 하고 있다고 고발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아가자 정여립은 아들 함께 죽도로 달아났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결하였다. 정여립 자결 이후, 선조는 비대해진 동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인의 좌장 격인 정철을 임명하여, 동인들을 3년 가까이 옥사를 치르게 된다. 이후, 서인 세력이 주도권을 갖게 되면서, 동인과 대립하게 됩니다.

결론

붕당정치는 23대 순조까지 이어지며, 다시 등장한 외척 세력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막을 내릴 때까지 조선의 정치세력의 큰 틀로 여겨집니다. 당시 왜는 조선의 망조는 붕당 세력이라며 이간질을 하였지만, 지금의 입장을 보면 정치세력의 견제는 건전한 조선의 정치라고 보여집니다. 다음에는 선조가 변고를 예상하지 못해 비난받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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