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는 명종 즉위년인 1545년 왕실 외척 간에 권력 다툼으로 불거진 사화 이야기입니다. 중종의 제1계비이며,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대윤파)과 중종의 제2계비이며,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소윤파) 간의 권력 세습을 차지하기 위한 대립 다룬 이야기입니다. 이에 이 사건 "을사사화"라고 하며, 대윤파를 숙청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사건을 계기로 숙청을 한 사건을 "정미사화"라고 합니다. 이에 두 사화 얘기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권력의 이동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권 권력은 권신에서 외척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중종이 승하하자 넷째 아들이며, 세자로 책봉된 인종이 1544년 11월 즉위하게 됩니다. 이때 외척 세력 중 정경왕후의 오빠 윤임(대윤파)이 득세하여 사림의 세력을 중용하였는데, 많은 인재를 적세적소에 배치하며,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사림 세력은 그 기세를 회복하게 됩니다.
또한, 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우애와 효심이 깊어 유교의 이상적 군주로 생각해서인지 즉위 후, 기묘사화로 축출된 조광조를 구명하는 상소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조광조가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현량과를 부활하고 성리학을 기반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매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인 1545년 6월경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해지자,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왕권을 전위한다고 밝히고, 그 해 7월 1일 승하하였다.
갑작스러운 명종의 즉위로 대윤파의 기세는 기울고, 윤원로, 윤원형 형제의 소윤파가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명종의 수렴청정
인종의 갑작스러운 급사로 명종이 12세의 나이에 즉위함에 따라 수렴청정이 자연스레 거론되며, 소윤파와 어머니 문정왕후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대윤파 윤임이 명종의 지병인 "안질"로 빌미로 왕위 계승 반대하였다. 그러나,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명성왕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명종의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을사사화
대윤파 윤임이 영의정 유관 및 유인숙 등과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를 탄핵하여, 귀향을 보내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권력다툼의 서막이 시작됩니다. 소윤파 윤원형은 사림을 배제하기 위해 평소 이들에게 원한을 가진 정순붕,이기 등과 함께 계책을 꾸미게 되는데, 자신의 첩 난정으로 하여금 문정대비에게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명성왕후는 대윤파를 역모죄로 규정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은 사사시키고, 사림파인 이덕응, 이휘 등을 유배함으로 사림파는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이 무고사건으로 빚어진 옥사를 "을사사화"라 합니다.
이 역모는 1545년 희빈 홍씨(봉성군 모친)의 제부인 경기관찰사 김명윤이 대윤파 작당들이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윤임 외종질)과 중종의 다섯째 아들인 "봉성군" 중 한 명을 인종 다음 왕위 승계를 위해 윤임의 역모를 묵인했다고 이유를 들어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을 회유하고 역모 사실을 고변케 하여 대윤파를 대거 숙청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미사화
정미사화는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소윤파 윤원형이 대윤파의 잔당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숙청 사건으로 보입니다. 1547년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붉은 글씨로 익명의 벽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명종에게 보고하기를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고 쓰였다고 보고하면서, 소윤파 윤원형은 지금이라도 발본색원하여 처단해야 한다고 하며, 숙청을 예고했었다. 예로부터 양재역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며, 특히 말들이 쉬었다 가는 말죽거리로 유명한 곳이어서 이런 소문을 만들기에는 매우 용이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할 사안은 그 문서의 진위나 작성자를 색출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이나 문정황후를 비롯한 대신들이 이 사건에 진위를 파악하지 않는 것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원형과 이기가 주도하여, 윤임의 잔당 세력인 봉성군, 송인수, 이약빙 등이 사사시키고, 권벌 등 20여명을 유배시켜 사건을 일단락하였다. 이 옥사를 "정미사화"라고도 합니다. 또한, 문정대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계기로 일어난 것으로서 대윤파에 대한 제거방법으로 이용된 사건이다.
윤원형은 이러한 음모수법으로 사림과 그의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비명에 죽은 대신은 6년간 1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윤원형의 세도와 수렴정치의 폐단은 심화되어 갔으며, 1553년(명종 8) 친정 이후도 그 폐단은 가시지 아니하였다.
청정수렴 이후
1553년(명종 8년) 20세가 된 명종은 수렴청정 이후, 군주로써 왕도정치를 구축과 명성대비와 윤원형의 그늘을 벗어나고 자, 자신의 외숙부 이량을 이조판서로, 그 아들 이정빈을 이조전랑으로 등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량은 명종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만들어 김안보와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행동 했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 사림출신의 윤근수, 이문형 등을 밖으로 추방하고, 심지어는 반대사림들을 숙청하기 위해 사화를 일으킬 흉계를 꾸미기도 하였다.
이 흉계는 심의겸의 밀고로 이량은 유배 후 사사되고, 그 일당의 세력은 제거되었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윤원형은 그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 , 1565년 문정대비가 죽자 몰락하고, 신진사류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귀양 갔던 노수신, 김난상, 유희춘, 백인걸 등이 돌아와 요직을 차지하고 재야의 신진사류가 많이 등용되어 정계는 사림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유교정치가 재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들 중심의 대의명분론적 유교정치는 선조대로 이어져 권력지향적인 붕당의 싹이 되었다.
결론
조선 전기의 사화들은 훈구세력과 궁중 또는 외척에 의해서든 간에 화를 당한 쪽이 거의 신진사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정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세의 당쟁과 연결된다. 다만, 사화에서는 학통과 정치이념상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당쟁은 순전히 정권을 잡기 위한 정치투쟁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당파성이 강하였다. 또한, 사화의 영향으로 사림들이 고향에 은둔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은둔한 사림들에 의해 서원이 일어나 사림의 학문적 도장으로, 정론의 광장으로 후세 당론의 진원지가 되어 붕당세력의 온상이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발달과 성격은 조선왕조의 정치문화적 특성과 정치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