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권력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반정 공신과의 갈등, 급진 사림세력인 조광조 일파의 개혁 압박, 외척의 등장으로 집권 내내 평화로운 나날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외척 세력의 반란 사건인 "정유삼흉"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조정의 빈자리를 반정세력(훈구 세력)이 부활할 조짐을 보이자, 이에 권력의 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중종은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를 등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안로는 조광조와 같은 급진 사림 세력으로 낙인찍혀, 유배되었다가 극적으로 복직되어 기사회생합니다. 그러나, 반정 세력(훈구 세력)의 견제로 인해, 요직에는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중종의 기대와는 달리 막강한 외척 세력이 등장하면서 중종의 통치 기간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혼란 정국은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김안로의 등장
중종의 외척인 파평 윤씨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과 달리 김안로는 아들인 김희가 중종 정실 정경왕후 소생인 효혜공주(인종 친누나)의 부마(사위)로 낙점되면서 그의 지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며느리 효혜공주의 요청과 중종의 효혜 공주를 생각하는 마음에 김안로를 주요 요직인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하면서 중종과 매우 가까운 외척이 됩니다.
1522년 11월 예조참판이 되고, 다음 해인 1523년 2월 이조참판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던 김안로는 외척세력의 견제를 우려한 반정 세력인 영의정 남곤, 심정, 대사간 이항 등의 1524년 11월 탄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중종은 그의 대한 탄핵을 용인하지 않았으나, 이후 여러 상소문으로 그의 탄핵을 요청이 끊이지 않자, 개성군 대성면 풍덕리 부근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휘와 며느리 효혜 공주는 구명운동을 계속 벌였으나, 반전 공신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고, 중종도 여러 대신과 사헌부도 반대하여 구명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안로의 반격
김안로는 유배지에서 그의 아들 김희를 통해 정적인 영의정 남곤 세력을 퇴출하기 위해, 인종의 생일 때 동궁 뜰에 태운 쥐를 내걸어 저주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곤 세력의 몰락을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다만, 엉뚱하게 경빈 박 씨가 연루된 협의로 그의 아들 복성군과 함께 사사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안로는 반격의 기회를 잡게됩니다. 갑작스런 남곤의 죽음으로 아들 김희와 효혜 공주는 간청을 올리며 구명운동을 가속화 합니다. 1530년 유배 중이면서도 대사헌 김근사와 대사간 권예를 움직여 심정의 탄핵에 성공하고,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서용되어 도총관, 예조판서, 대제학을 차례로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1531년 예조판서 등용되며 심정과 이항을 사사시키고,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해 정치적 후견인인 며느리 효혜 공주가 사망하면서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정적 제거를 완성하며 정사를 좌지 우지하게 됩니다. 김안로의 기세가 등등하자 위기감을 느낀 반정 세력은 중종에게 꾸준히 상소를 올리며 파직을 청원하였지만, 왕은 반대를 하며 김안로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권력 장악
김안로의 권력장악은 중종도 묵인한 듯 합니다. 중종 입장에서는 영의정 남곤 등 지배 세력이 사라지면서, 믿을 만한 세력은 외척인 김안로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또한, 자신의 최측근인 효혜 공주와 사위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중종의 상심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1531년 정계 복귀 후 동궁(인조)의 보호 구실로 윤여필의 아들이자 인조 어머니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과 실권을 장악하고 허황, 채무택, 황사우 등과 함께 문정왕후 세력과 사림 세력을 대량으로 제거하기 위해 유배 혹은 사사시켰습니다.
이후에는 지속적인 승진과 파직을 반복하며, 1533년 왕실의 최측근이 맡는다는 내의원 제조까지 오르는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그 뒤에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에는 우의정, 그 이듬해에는 좌의정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김안로의 말로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여 친족, 재상과 종친 등에 관계없이 이를 축출하여 사형시키는 등 무서운 공포정치를 하였던 김안로는 경빈 박 씨와 복성군 미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허항, 채무택과 함께 정유년의 삼흉 이라고 해서 정유삼흉으로 불린다. 한때 중종은 그의 권력 확장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으나, 동궁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있었고, 또 다른 외척인 파평 윤 씨 집안 하고도 연결되어 있어 그를 손대지 못했다고 한다.
1537년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문정왕후의 밀명을 받은 윤안임과 대사헌 양연, 윤안인 등의 공격을 받고, 체포, 유배되었다가 그 해 10월 27일 유배지에서 사사를 당하였습니다.
결론
단종 때부터 벌어진 권력에 대한 권선징악은 지금의 세상과 별다른 세상이 아닌 듯합니다. 처음에는 단종 이후 권력의 이동이 궁금해서 찾아보기 시작한 것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보통 정사보다는 야사에 더 많은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게 조금 아쉬를 따름입니다. 제가 결론 내린 건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얘기로 결론을 내고 싶습니다. 다음 이야기로는 조선시대의 4대 사화 중 마지막인 "을사사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