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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이야기

by 부품쟁이 2023. 10. 13.

조광조는 조선전기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유교 중 주자학의 핵심인 도학정치를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는 데 전심을 다하였으나, 소격서를 폐지하고 현량과를 설치하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으로 인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한다. 또한, 위훈 삭제를 주장하여 훈구파를 축출하려 하다가, 그들의 강한 반발을 부딪혀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기묘사화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조광조와 기묘사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장기

조광조는 1482년(성종 13)에 태어났으며,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개국공신 조옹의 5대 손자입니다. 조선의 개국공신 가문인 훈구파의 집안이지만, 이후 김굉필을 만나면서 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7세 때 평안도 희천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당시 무오사화로 희천에서 유배중인 김굉필을 만나면서 도학(주자학/성리학)을 수학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리학의 연구에 매료되면서 김종직의 학통을 잊는 사림파의 학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또한, 그는 학문의 식견을 넓히고자 다른 문화생과 정치견 견해 및 학문에 대해 연구를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김굉필의 친구인 남곤을 알게 되었는데 향후, 정치적 라이벌이 되는 사이가 됩니다.

1504년 갑자사화로 김굉필이 사사되면서 도학의 연구가 주춤하게 되는데, 그는 전혀 개의치않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게 됩니다.

장원급제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던 조광조는 1505년 장원에 급제하여, 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대적인 모습은 정치적인 분위기 쇄신 등 변화를 위한 정치를 갈망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과 성균관 유생들의 권유로 "조지서사시"에 관직에 초임되었습니다. 그 해 별과 문과에 급제하여 두루 관직을 역임하며, 중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교사상이 근본이 되는 지치주의에 입각한 와도 정치 실현을 역설하며, 사림의 영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개혁정치

왕도정치에 입각한 정치를 꿈꾸던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성리학을 현실정치인 지치주의 사상을 접목하기 위해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도학 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인 사상으로 바꾸는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학풍은 조광조 이후 이황, 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 할 수는 계기가 됩니다.

1518년 그는 부제학으로 승진하면서 좀 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숭불정책의 일환이면서 미신타파를 위해 "소격서" 폐지를 주창하고,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중종에게 신임을 얻게 되어 혁파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해 대사헌에 제수되어 올라른 인재를 중용하기 위해 현량과를 설치하게 된다. 현량과는 학문, 덕행, 재주가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여 군주가 직접 선발하는 제도로써, 젊은 인재를 양성하고 왕도정치를 지향하는 중종과의 생각이 일백상 통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현량과를 통해 김식, 안처겸 등 젊은 인재를 요직에 안배하고, 신진 사림 세력으로 기존 훈구 세력에 대항, 구제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습니다.

훈구 세력의 대항

훈구 세력은 신진 세력이 너무 급진적이고, 위협적인 언행을 일삼는 등 이런 정책과 관련해 남곤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그는 지나친 급진성은 오히려 성리학적 이념 전파에 걸림돌이 된다며 그를 나무랐지만, 조광조를 급진적인 인물로 보고 기피하거나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훈구파들의 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를 추천했던 안당과 정광필도 너무 과격한 정책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조광조의 뜻을 굽힐 자는 주군인 중종도 아니었다.

중종과의 갈등

중종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 반정 세력의 전횡을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유교를 기반하는 이상적인 도학 정치를 펼치기 원했지만, 지지기반이 적었던 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새로운 기득권을 원하는 동상이몽을 꿨다.

이런 급진적인 정책들로 중종도 점점 지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원로파 즉, 반정 세력과 신진 사림 세력의 대립으로 발전하며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기묘사화

당시 반정 세력의 재상으로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기존 훈구 세력은 불만이 상당했다. 또한, 신진 사림 세력에 우호적이었던 정광필, 안당도 사림 세력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고, 조광조로 인해 벽지로 좌천된 남곤, 심정 역시 과격한 급진 개혁으로 인해 염증을 느끼게 된다.

1519년 조광조등 신진 사림 세력은 정국공신(반정 세력) 가운데 거짓 공신들이 너무 많다고 비판하며 성희안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 책봉되었고, 이렇게 공신 자격이 없는 사람의 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잘못되었다고 하며,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박탈을 강력히 주창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진 사림 세력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 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 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훈구 세력 중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경빈 박씨등 후궁들과 결탁하여 신진 사림 세력을 중종의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꿀물을 이용하여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심기가 불편하였던 중종은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을 훈구 세력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신진 사림 세력을 견제하고자 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중종은 당시 승지도 모르게 대소신료를 입궐께하고,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을 훈구 세력을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으로 입궐하게 하여, 비밀리에 회의를 주관하게 된다. 홍경주기 대표하여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 세력이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중종에게 탄핵을 주창한다. 중종은 대사헌 조광조를 비롯한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 사림 세력의 핵심인물을 잡아 가두게 된다. 그 해 기묘년 12월 모두 사사되었다.

결론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 세력의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으로 해석이된다. 다만, 이 시기에 성리학은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유교 사상을 전파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광조의 도학정치는 이러한 계기로 인해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 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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