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rigin="anonymous"> 조선시대 문신, 한명회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시대 문신, 한명회 이야기

by 부품쟁이 2023. 10. 5.

한명회는 조선 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입니다. 한명회 집안은 고려 말기에 정치적 권력이 상당한 집안이었으며, 할아버지인 한상질은 조선의 개국 공신이기도 했습니다. 한명회는 과거에 실패한 후 말단 직위로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그는 계유정난을 설계하여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활약하였으며, 세조가 즉위한 후 여러 가지 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세조 사후에는 원상으로서 어린 왕을 보필하며 국정을 운영하였고, 예종과 성종에게 딸을 왕비로 보내 권세와 부를 누렸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조선시대 전기 문신인 한명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장기

1415년(태종 15)에 태어나 1487년(성종 18)에 사망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글을 읽는 것보단 전국 유람하는 것을 좋아해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1452년(문종 2) 친구 권람을 통해 문음으로 경덕궁직(말단직)으로 조정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 등 대신이 집권하자,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접근하여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참모가 되었다.

계유정난

호시탐탐 조카인 단종의 권력을 이용하려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453년에 발생한 계유정난에서 한명회가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 물품을 관리하는 군사녹기로 승진했습니다. 이후에는 사복시소윤으로 임명되었고, 동부승지로 이동하여 세조의 즉위와 함께 좌부승지로 승진했습니다. 좌익공신 1등에 오르며 우승지가 되었습니다.

1456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로 인해 도승지로 승진했습니다. 1457년에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상당군으로 봉해졌고, 그 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습니다.

1459년에는 황해·평안·함길·강원 등 4도의 체찰사로 임명되었고, 1461년에는 상당부원군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에는 우의정, 1463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1466년에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시애의 난

세조 즉위 후에도 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들을 제압하고, 권람, 신숙주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세조 권력에 크게 기여하였다. 1466년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을 제안하고, 한양 출신을 지사로 임명하면서 지방 출신 수령들과 차별을 두기 시작한다. 이에 불만이 쌓인 이시애가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하여 관직을 그만두면서 반역을 음모하게 된다. 함길도(함경도)의 군민의 차별에 불만이 쌓인 이시애는 조정에 신숙주와 한명회가 모의하여 함길도 군민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내어서 신숙주와 함께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을 당했으나, 한명회의 정치 인생에 최대 위기를 맞이하지만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명회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관직을 사직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말년기

1468년 세조가 죽자 19세 나이에 예종이 즉위하였으나, 세조의 유교에 따라 원상제도가 시행되어서 실권은 없는 상태에서 한명회, 신숙주의 공신들이 조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같은 해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책록 되고, 1469년(예종 1)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예종이 갑자기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1등에 책봉되고, 영춘추관사로서 최항 ·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완성하였다. 또한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했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해 경사 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해 비치하게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이 하사되었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 까지 고관 요직을 두루 역임, 군국 대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세조는 그를 총애해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하였다. 4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권세와 부를 누렸다.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지금의 ‘압구정’이라 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와서 구경하려 하자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무례함이 대간들의 탄핵 대상이 되어 외지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487년 70세로 사망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사에 관련하였다 해 부관참시되었다.

결론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하고, 예종의 수렴청정을 거부하고 원상제도라는 권리를 내세우며, 사실상 실권을 잡고 조정을 움직임 바, 백성으론 존경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역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또한, 조정의 진출도 음서를 통해 들어가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엄청난 출세를 했기 때문에 지금의 평가는 최고의 책사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