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rigin="anonymous"> 삼국 시대, 애증의 나라 당나라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삼국 시대, 애증의 나라 당나라 이야기

by 부품쟁이 2023. 9. 16.

당 태조 이연은 수나라 이후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일한 귀족 이연은 반란을 주도하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막강한 군사력, 다양한 사회 구조, 상당한 문화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문화 중심지로 번성하여 '중국 문화 혁명'이라는 강대국으로 입지를 다졌다. 한반도에서 당나라와 삼국시대의 관계가 복잡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나라의 역사

기원

당나라의 기원은 중국에서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6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 집중식 통치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907년에 결국 쇠퇴할 때까지 권위를 유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기록된 인구는 5천만 명을 넘었습니다. 왕조는 지배적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여러 지역에 걸쳐 영토를 동시에 확장하는 동시에 중앙아시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초기 

당 태조 이연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지배하기 위해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으나,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국력이 쇠퇴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연은 수나라의 황실과 외척 관계에 있었으며, 아버지인 산시성 성주의 도움과 아들 이세민과 함께 상당한 군사력과 부를 동원하여 617년에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고 수나라 양제를 폐위시켜 당나라를 건국하였다.

이후 당태조 이연은 626년까지 통치하며 안정된 정치를 기반으로 당나라는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연은 당나라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둘째 아들 이세민의 의해 황제를 양위해야만 했습니다.

당 태조의 신임이 두터운 이세민의 세력을 경계하던 황태자인 장남과 삼남 형제의 견제가 시작되면서, 결국 형제간의 변으로 발전되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이세민에 의해 형제는 살해되고, 이세민은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결말이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태조 이연은 황제에서 물러나면서 이세민이 태종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당 태종과 고구려

당나라 건국 당시에는 북방 세력에서 돌궐이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 즉위 이후에도 돌궐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이에 당나라는 돌궐을 토벌하기 위해 앞장서며 영토 확장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지지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침략도 한 가지 전략으로 이용했습니다. 이를 위해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민심이반의 갈등을 봉합하고자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장수인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화친을 맺은 고구려 영류왕을 처형하고 보장왕을 옹립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이때 태종은 고구려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고구려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후 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으나, 고구려 대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안시성을 방어하는 양만춘을 정복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태종은 여러 번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중기

측천무후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궐하였으나, 당 태종 사망 이후 막강한 권력을 얻어 황태자였던 당 고종의 후궁이 되었고, 나중에는 황후가 되었습니다. 655년 갑작스러운 당 고종의 부재로 인해 그녀는 국정운영을 직접 관할하며,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워 대리청정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683년 당 고종이 사망한 후에는 중종이 황위에 오르려 하지만, 측천무후는 막강한 권력을 통해 중종을 폐위시키고, 직접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690년에 주나라를 건국하여 여황으로써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측천무후의 권력은 측근들의 부패로 인해 무너져갔습니다. 그녀는 병으로 인해 힘이 약해지자 측천무후를 물리치고 폐위한 중종이 다시 권력을 잡아 측천무후의 내란을 종식시키게 됩니다.

당의 6대 황제인 현종 때부터 44년 동안 통치하여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진보적인 정책과 명재상들을 임용하여 현명한 정치를 통해 여러 선진 문화를 수용하고 국민의 안정을 굳게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741년에 현종의 며느리인 양귀비가 궁궐에 들어와서 국정운영에 소홀해지게 되고, 국정운영을 담당하던 재상들의 부패로 인해 당 후기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후기

9세기는 대체적으로 당나라의 중흥기로 볼 수 있습니다. 당나라는 상업의 발전과 시장의 개방을 가져와 시장경제가 풀리면서 상인 계급이 등장하여 경제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특히 항저우, 양저우와 같은 현대의 대도시들이 생겨났으며, 당나라 후기에는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8세기 후반에는 당나라의 국력이 쇠진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중 덕종은 양세법을 시행하여 재정을 건전하게 개선했으며, 전쟁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후 헌종은 재정 개혁을 추진하고, 수도에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며 중앙 집중적인 권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 군대는 당시 당나라의 최정예병으로 알려져 있으며, 약 24만 명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헌종은 말년에 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강력히 신봉하는 등 점점 퇴락하다가 결국 환관에게 독살당했습니다. 그 후 황제들은 사냥, 연회, 향락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며, 환관의 권력이 점점 커지면서 관리들은 당파로 나뉘어 서로 싸움에만 전념했습니다. 결국 문종 황제가 환관들의 권력을 제한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당나라는 완전히 환관들의 손아귀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황소의 난

희종 때에 황소의 난이 터지며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지방 절도사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중앙 관리의 당쟁과 환관의 횡포가 심해지고, 조정의 지배력이 흔들리며 백성에 대한 약탈도 강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토호나 상인층도 당왕조에 심각한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당 말기에는 소금세가 높아지면서 소금 판매업자들이 가격을 높여 폭리를 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소금 밀매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밀매를 위한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한 배경에서 874년에 복주지방(허난 성)의 소금 밀매업자인 왕선지가 난을 일으켰습니다. 얼마 후 원구지방(산동성)의 소금 밀매업자인 황소도 난을 일으켜 왕선지와 합류하였습니다. 왕선지와 황소는 하남성과 산동성 일대를 점령하며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왕선지가 황매(후베이 성)에서 관군에게 죽은 후 황소는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허난, 산둥 등 당나라를 대이동 하면서 880년에는 60만 대군으로 성장하였고, 황소의 군대는 장안을 함락하게 되었습니다. 황제 희종은 사천으로 도망가고, 황소는 장안에서 스스로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부르며 항복한 관리도 기용하여 통치를 굳히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소의 정권은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당나라 왕조를 돕는 투르크계 토벌군에게 격파되었습니다. 이 난으로 당나라는 23년간 존속하지만 명백히 유지했을 뿐이며, 근본적으로 당나라의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

당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입니다. 먼저 한반도의 삼국 시대에서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를 종식시켰습니다.

신라와 발해는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교역하는 등의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지만, 몽골 제국과 요나라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치열한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세 차례에 걸쳐 전쟁으로 멸망시키고, 백강 전투에서 백제를 멸망시킨 데 기인합니다. 또한, 당나라는 신라와의 나당 전쟁으로 통수를 치며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이 당나라에게는 한국사에서 필수적인 역사입니다. 좀 더 역사를 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 당의 역사를 알아봤습니다.

 

다음에는 유목세력이면서 발해 역사의 한 일부분인 돌궐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