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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가장 큰 변란, 임진왜란 이야기

부품쟁이 2023. 10. 27. 18:16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를 걸쳐 왜(일본)가 우리나라를 침입한 가장 큰 변란을 이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시련과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민족의 운명을 각성하게 된 사건이었으나, 세조 때부터 벌어진 대신들의 권력 다툼 즉, 여러 사화로 인해 나라는 점점 피폐해져 갔고, 나라를 망친 원인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전란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중국의 명나라과 청나라가 교체되는 과정을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겪겨되면서 한반도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에 임진왜란의 발생 원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배경

조선

조선의 제7대 왕 세조 이후, 제13대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4대 사화와 권문세가인 훈구와 사림 간에 계속된 당쟁은 중앙 조정의 혼란을 가속화하였다. 특히, 사림은 선조 즉위 이후까지 권력을 유지하며, 한 나라의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파국의 시발점이 됩니다.

군사적인 면도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외세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병무를 담당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를 하였으나, 이 조직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율곡이이는 이런 대내외적인 상황을 인식해 남 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 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오랜 내부의 분열과 국가 재정도 원활하지 않아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나약함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 조선의 현주소였다.

왜(일본)

왜(일본)의 조선 침략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부터 부산, 김해, 진해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약탈과 침입으로 조정의 왜를 소탕하기 위해 노력한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왜 역시 대륙에 대한 욕심과 망상에 빠져있어 끊임없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를 거치며 실행에 옮겨진 게 임진왜란이었다.

이에 따른 왜는 15세기 후반, 시장을 서양인들에 개방하여,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고,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다이묘(영주)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왜의 정국 안정과 통일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 영주 소 요시토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명과의 관계 회복에만 관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계략은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고 합니다.

명나라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군신 관계라 할 수 있는데, 조선 전기부터 왕이 즉위하면, 정통성 유지라는 명분으로 명의 황제에게 책봉을 받아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관계인 사대관계로 되어있었다. 조공 역시, 사대 관계의 하나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 간섭은 없었지만, 북방 오랑캐로 알려진 여진족의 문제, 조공 문제로 빈번히 분쟁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다만, 조선 전기인 15세기부터는 세종대왕의 부국강병 정책은 외부의 적을 타파하는 강한 국가와 농업을 기반한 경제적으로는 탄탄한 나라를 지향하여 새로운 실용적인 문화가 정착되면서 명과의 통상은 원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명나라와의 사대 외교는 명나라에 굴욕적인 안보정책 이라기보다는 조선보다 강국인 명나라를 상대로 왕의 권력 안정을 확보하려는 외교였으며,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원인

왜의 분열

임진왜란의 원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왜의 내부 길 등을 외부로 돌리는 위한 설이 있는데,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완벽한 "센코쿠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전쟁으로 불만이 오를 때로 오른 장수들과 전국통일(센코쿠) 체제를 완성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에서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견제 등 여러 측면으로 조선 침공이 가장 선택하기 좋은 아이디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쇼군이 되기 위한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민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이와 반대로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카자키 성주이자 무장인 아버지와 가리야성 성주이자 무장인 외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히데요시 가문과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전국을 통일한 장수였지만,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되기 위해선 이에야스를 압도할 명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란을 일으킨 후, 대부분 다이묘(성주)들이 전쟁에 참가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측근들은 처음부터 조선침략을 반대했고, 전쟁에 필요한 병력, 군수품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참전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며, 명나라에게 수차례 요청 끝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명나라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평양성까지 진격하며 왜군을 한양까지 후퇴시켰다. 그러나, 명나라는 왜의 침공이 자신들까지 피해가 오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에 종전 협상에 좀 더 적극적인 면을 보였다. 왜는 이런 명나라를 파악했는데, 불리하다 싶을 때마다 종전 협상을 매게로 화친조약을 남발하며 시간을 끌어 무려 전쟁을 7년이나 지속시킨 이유였다. 

결론

이 글을 쓰면서 세종대왕의 부국강병 정책이 당시에 얼마나 소중한 정책이었나,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부흥기인 세종대왕 시절이 없었다면, 조선은 일찍이 분열했을 것이고, 이러한 것을 내용을 보면서 임진왜란의 승기를 잡는 것은 결국은 집권층인 사림 세력도 아닌 유생도 아닌 의병 즉, 일반 백성들이 나라를 다시 세우는 위대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책은 지금도 유효하고, 본받아야 될 소중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