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폭군, 연산군 이야기
연산군은 1476년 11월 성종과 폐비 윤 씨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1483년(성종 14년)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494년 12월 (성종 25년) 선대 왕인 성종이 승하하자 18세 나이로 즉위하며, 12년간 재위하게 됩니다. 이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혼돈 시대의 연산군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성장기
연산군의 세자 책봉 전, 성종과 중전 윤 씨는 관계가 원만하진 않았다. 이에 인수대비와 후궁들이 윤 씨를 폐하고 궁을 떠나게 한다. 어린 연산군은 계비인 정현황후(훗날 중종母)를 정실로 여기며 자랐는데, 연산군이 즉위한 직후, 생모 제헌왕후의 사사(賜死)한 내용을 알게 되면서 연산군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무오사화
성종은 세조의 적장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자인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자, 숙부인 해양대군(예종)이 즉위하면서 왕권과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갑작스레 급사하여,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과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13세인 나이에 제9대 왕으로 즉위한다. 이는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구파(신숙주, 한명회) 공신들의 계략으로 만들어져, 9년 동안 정희왕후 윤 씨가 수렴청정하게 된다.
성종은 1476년 왕권을 복원하면서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중심으로 사림파를 중용하게 됩니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으로 반대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세조 때 만든 원상제를 폐지하고 훈구파의 세력을 압박하게 됩니다.
이에 사림파는 세조 때부터 공신의 신분으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정치적, 경제적인 부패를 일삼은 비판 하며 빈번하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림파의 치우친 권력이 도를 넘어 성종 말기 때까지 이어집니다.
연산군 즉위 직후인 "성종실록" 편찬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국왕, 대신과 대립관계인 사림파 대신들은 사림파의 김일손이 실록에 올리기 전 편집본인 사초(史草)에 선대 세조의 단종 시해 내용인 "조의제문"을 올리며, 연산군이 사림파를 숙청하는 계기가 됩니다. "조의제문" 작성자인 김종직은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을 처형과 함께 52명을 처벌하면서 사림파는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연산군은 무오사화 이후, 삼사에 위축된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 개혁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킵니다.
갑자사화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년에 훈구, 사림파 중심의 세력이 생모 폐비 윤 씨의 사사 사건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된 연산군은 사건에 직접 연루된 자들만이 아니라, 그 자녀,가족,동족까지 연좌제식으로 가혹하게 처벌한 사건이었다. 연산군의 추궁은 사림파 그치치않고, 훈구세력에까지 미치면서 사건은 궁중 세력과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의 정치 투쟁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사화를 계기로 연산군의 실정은 더욱 심해져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청하게 되었고, 마침내 중종반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의 복위를 위해 성종묘에 제사를 극진히 모시려고 하였으나, 반대하는 신하는 처형하거나 귀향을 보냈다고 한다.
감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위계질서를 관할하는 암반과 사헌부를 동원하여, 성균관의 문신들과 유생들을 감찰하기 시작한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이들을 감시하게 하고, 중요 관직을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 임명하여 문신들에 대한 우대를 철회한다.
폐위 및 유배
1506년 09월 02일(연산군 12년) 반정이 일어났다. 성희안, 유순정 등 문인들이 사병을 일으켜 연산군 최측근인 임사홍 등을 살해하고, 조정을 장악하여 성종과 정현왕후 윤 씨의 아들인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연산군은 폐위되어 민가에 숨어 지내다가 체포되어 왕자들과 함께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강화도로 유배된 연산군은 역질에 걸려 매우 건강이 안 좋았고, 연산군과 유배되었던 왕자들은 사사되거나 사형을 당하여서 연산군의 명을 재촉한 일이 있었다.
연산군은 유배된 지 2개월 만인 1506년 11월 06일 역질 후유증을 사망하였다.
맺음말
성종의 적장자이자 10대 왕인 연산군은 조선시대의 폐주의 한 사람이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해 정작 정사를 제대로 보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합니다. 집권 초기에는 군사 및 정세에 안정을 가져다준 정책과 왜의 칩입에 따른 국방력 강화에 힘을 써 좋은 평가를 받은 적도 있지만, 워낙 폐주에 대한 비판이 많다 보니, 평가가 좋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연산군의 평가를 중종반정을 통해 좀 저 자세히 살펴보면서 좀 더 깊이를 가지고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