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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와 한반도를 양분했던 발해국 이야기

부품쟁이 2023. 9. 12. 18:48

발해는 중국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점령하여, 통일신라와 함께 한반도 남북국 시대를 연 고대국가이며 698년 고구려 옛 장수 대조영이 건국하였다. 이에 발해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해의 건국과 성장

발해의 건국

고구려 멸망 이후 이야기는 고구려 피난민들이 당나라로 강제이주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이주민들은 고구려족, 말갈족 등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696년 당나라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요동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대해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장수 대조영은 698년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는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요청했다. 장수 대조영이 세운 새로운 나라는 고대 발해국의 이름을 따서 '발해'라고 하였으며, 고구려를 계승한 중요한 국가이다.

발해의 성장

태조 대조영부터 3대 문왕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발해는 영토 확장과 제도 개선,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발전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이뤄졌습니다. 예를 들어, 발해는 여러 돌궐 부족들을 흡수하여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고, 만주 북부 일대를 장악하여 군사적인 영토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발해는 국내 정치와 법률 제도를 개선하여 국가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발해의 발전은 주변 나라들에게 긴장을 유발했습니다. 특히, 나당 전쟁으로 힘을 잃은 당나라는 발해의 성장을 두려워하면서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국가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발해의 사회와 경제

사회구성

발해는 현재의 다문화 사회로 볼 수 있습니다. 발해 건국 시에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등 다양한 출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발해는 매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발해는 다양한 사회를 경험한 나라가 되었으며, 발해의 역사는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에서 비롯됩니다.

발해가 태조 이후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하면서 더 많은 유민들이 복속되었고, 나라는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민들의 복속은 발해의 문화적, 경제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불어 발해는 이 시기에 많은 문화적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발해의 문화가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경제

발해는 지리적으로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후와 토양 조건이 좋지 않아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서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농업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동부 지역에서는 농업과 어업이 함께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북쪽 지역에서는 수렵과 목축업이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들이 발전한 지역마다 경제적 자립도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역마다 자원과 인프라의 부족, 그리고 지배 계층에 의한 불공평한 지원으로 인해 발생하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해는 지역별 발전 계획을 수립하여 지역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불교와 신앙

다문화 사회인 발해는 다양한 종교를 믿습니다. 발해의 종교는 불교, 도교, 무속신앙 등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과 관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발해 왕족들은 불교를 중요한 종교로 인식하고 수용했습니다. 불교는 국가의 정책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심지의 주요 거점에 다수의 사원과 사찰이 건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찰들은 국가에서 관리되었고, 발해 국민들의 일상생활과 믿음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불교가 발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 중 하나는, 발해 왕족들과 귀족층, 농민층, 노비 등 모든 계층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적극적인 전파 활동을 펴왔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무형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와 수용으로 인해, 발해 국민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불교는 발해에서 국가의 정책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불교의 영향력은 커져갔습니다. 발해에서는 불교에서 비롯된 문화적 요소들이 다른 사회적 미학적 표현들과 융합되어 발전했습니다. 발해 초기에는 고구려식 불교문화가 전파되어 귀족을 중심으로 전파되었으나, 이후 발해 유민에게 전파된 후 요나라와 금나라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은 중국과 일본 등의 인접한 국가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불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발해의 종말

발해가 쇠퇴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 시대로 분열되면서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시대가 도래하면서 거란족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916년, 거란족은 혼란을 틈타 다양한 부족들을 흡수하여 거란 제국을 세웠습니다. 제국은 발해의 요충지인 요동을 공격해 20년 넘게 전쟁을 벌였다. 피란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패하고 경제적, 군사적 타격을 입으며 결국 쇠퇴하게 된다.

거란족이 발해의 수도를 함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발해 피난민들은 저항운동을 계속하며 가차 없이 싸웠다. 그러나 1116년 발해는 결국 거란, 고려 왕조와 합병되면서 발해는 멸망하게 된다.

결론

발해는 고대 국가로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발전했습니다. 발해의 역사와 문화가 다양한 번성과 연구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한반도와 중국 역사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그 중요성은 현대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발해의 문화는 수많은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이 그 역사 속에서 창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현대에도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으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늘은 발해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에는 삼국시대의 번성을 좌지우지한 당나라에 대한 역사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